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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의 기록] 에펠탑 아래서 만난 이름 모를 여행자의 이야기 본문
10년 전, 나는 형과 어머니와 함께 유럽 가족여행을 떠났다. 형의 전역 축하이기도 했지만, 귀국 직후 입대를 해야 하는 나에게는 일종의 '최후의 만찬' 같은 여행이었다. 군대라는 거대한 벽을 앞둔 20대 청년에게 유럽의 화려한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었고, 내 마음은 줄곧 심란함으로 일렁였다. 15일간의 대장정 중 수많은 명소를 보았지만, 지금도 내 가슴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건 파리의 어느 언덕 광장에서 만난 한 남자의 이야기다.
프랑스 여행의 막바지, 에펠탑이 내려다보이는 광장에서 자유시간을 가졌다. 인파와 잡상인, 경찰들이 뒤섞인 활기찬 풍경을 뒤로하고 벤치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낯선 타지에서의 경계심은 익숙한 모국어 한 마디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동갑내기였던 그는 내 옆에 앉아 자신의 기막힌 여행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는 방학 내내 집에서 게임만 하던 소위 '집돌이'였다고 한다. 그런 아들이 안타까웠던 아버지는 비용을 전액 부담할 테니 일주일만 유럽에 다녀오라고 권유했다. 여행에 전혀 관심이 없던 그는 고심 끝에 딱 3일만 버티다 오기로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사건은 공항에서 터졌다. 출국 직전 전화를 건 아버지는 폭탄 선언을 했다. "비행기는 2주 뒤로 예약했고, 돈은 넉넉히 보냈으니 마음껏 즐기다 오너라."
아버지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고, 그는 깊은 배신감과 당혹감을 안고 독일 땅에 내렸다. 처음 3일간은 호텔 방에 틀어박혀 한국에 있을 때와 다름없이 핸드폰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 문득 '독일 맥주나 한 잔 마셔보자'는 생각에 호텔 앞 펍을 찾았다. 어설픈 영어로 맥주를 주문하고 쭈뼛거리던 그에게 외국인 무리가 다가와 말을 걸었고, 축구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며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그는 길바닥에서 눈을 떴다. 주머니 속의 지갑과 핸드폰, 모든 것이 사라진 상태였다. 비참한 기분으로 호텔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와 간신히 연락이 닿았을 때, 아버지는 너무나 태연하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돈이랑 기간 더 연장해 줄 테니, 이제 진짜 여행을 즐기고 와라."
그 한마디가 그를 깨웠다. 그는 아버지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에게 무엇이라도 남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길을 나섰다. 그렇게 홀로 유럽을 누비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나를 만난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그의 얼굴에는 혼자 힘으로 시련을 이겨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이 짧은 만남은 내 인생에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훗날 내가 혼자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떠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그 친구의 눈빛에서 본 '경험의 힘' 덕분이었다. 루브르의 예술품보다, 베르사유의 화려함보다 내게 더 큰 울림을 준 건 벤치에서 나눈 15분의 대화였다.
이제 나는 신혼여행으로 다시 파리를 방문한다. 무려 10년 만이다. 그때의 심란했던 청년은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다시 에펠탑 앞에 선다. 이번 여행에서는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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